키에르케고르의 <죽음에 이르는 병>을 읽고
감명깊은 문장들 / 제가 각색한 내용들을 끄적여 보았습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이 글은 아주 독특하게 보일 것인데, 그 이유는 교화적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엄밀하고, 엄밀하게 학문적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교화적이기 때문이다. (중략) 전자의 관점에 대하여는 동의하지 않는다...절대적으로 모든 것이 교화(구원)에 도움이 되어야 한다.
=> 이 책은 지금껏 내가 읽은 신앙서적 중 가장 난해하다고 느낀 책이다. 그렇기에 나는 이 책을 신앙서적보다는 철학서적으로 분류해서 읽으려 했다. 저자 키에르케고르도 심히 엄밀한 글이라는 것에 동의하고 있다. 하지만 글의 내용이 엄밀하게 학문적이든 난해하든, 궁극적인 목표는 구원, 신앙에 도움을 주기위한 책이다. 이 대목을 읽으며 나의 차가운 이성과 지식보다 뜨거운 마음과 신앙을 대입해서 읽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죽음은 가장 큰 영적인 비참을 나타내는 용어이지만, 그러나 이에 대한 치유 또한 죽는 것에서, 자기 자신에 대해 죽는 것에서 주어지는 것이다.
고통, 질병, 고역… 심지어 죽음 마저도 ‘죽음에 이르는 병’이 아니다. 죽음에 이르는 병은 절망이다. 이것은 바로 죽음에 이르는 것이라는 사실 자체이다.
절망에는 세 가지 종류가 있다.
1. 절망하여 자기 자신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식하지 못하는 절망 (비본래적 의미)
2. 절망하여 자기 자신이 되고자 원하지 않는 절망
3. 절망하여 자기 자신이기를 원하는 절망
인간은 두가지 사이의 ‘관계의 종합’(무한과 유한, 시간과 영원, 자유와 필연)이므로 아직은 ‘하나의 자기’가 아니다. 따라서 절망은 하나의 통합된 존재인 인간이 자기자신에 대해 가지는 관계 안에서 발생하는 분열이다.
인간이 자기 스스로를 정립하려 할때는 자기 자신으로부터 벗어나려는 절망이 생긴다. 외적인 것으로 자신을 규정하려 들고, 진정한 자기(자아)에 대한 관심이 없다. 자기가 소유한 것이 진정 나를 규정하진 못하구나 라는것을 깨닫고 나서는 신에 대한 관계성(하나님-나)을 추구하게 된다.
=> 내가 BMW 오너야, 내가 직장이 000야, 내가 000 아는 사람이야 등등 으로 사람들은 외적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하려 한다. 이는 '진정한 자기자신'에 대한 관심이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 대목을 읽으며 나를 반성하게 되었다. 진짜 중요한 것이 무엇이지? 공부? 직업? 이 모든 것은 지위, 재산 등 결국 외적인 것으로 나를 규정하려 하는 것들인데.. '진정한 자기자신'은 바로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 있다는 것을 상기해야 겠따.
절망
장점 : 인간 정신의 숭고함을 보여준다. (물체, 동물은 절망하지 못함)
단점 : 현실에서는, 파멸에 이르게 까지 한다. (진리에 있어 자기자신이 될 수 없음)
만약 절망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 다만 절망하고 있지 않다는 것일 뿐 그 이상이나 그 이하의 의미도 아니라면, 그것이랴 말로 절망이 되고 만다. → 절망하고 있지 않다고해서, 실제로 절망이 없다는 것이 아니다.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것이 진정한 의미의 절망이다.
절망은 ‘가능성’으로서 인간 속에 침전해 있는 무엇이다.
현실적인 절망의 모든 순간은 그 가능성으로 환원이 되어야한다. 즉 절망하고 있는 사람은 절망하고 있는 매 순간마다 절망을 스스로 끌어들이고 있는 것이다. 절망이 ‘가능성’이므로, 현실성을 갖춘다면 동시에 가능성 또한 갖추게 된다.
만약 가장 엄격한 의미에서 ‘죽음에 이르는 병’을 말하고자 한다면, 그것은 그 최후가 죽음이고 또한 죽음이 종국적인 것과 같은 그러한 병이어야만 한다. 그런데 이러한 병이야말로 분명하게 말해 ‘절망’이다. 죽음이 최대의 위험이라면 사람들은 살기를 원한다. 하지만 산다는 것에 더 큰 위험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사람들은 죽기를 희망한다. 그런데 죽음을 바랄 정도로 위험이 너무나 클 때, 절망이란 죽을 수조차 없다는 것에 대해 절망하는 것이다.
절망하는 사람은 자기자신에 대하여 절망 하지만 자기자신은 소멸시킬 수도, 다시 만들수도 무(無)로 돌아갈 수도 없다. 절망하여 자기자신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것은 바로 절망하여 자기자신이기를 원하는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절망하고 있지 않은 사람은 단 한사람도 없다고 말할 수 있다. 가장 깊은 내면의 동요, 불화, 부조화, 불안 등을 느끼고 있지 않은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절망에 대한 통상적(일반적)인 고찰은 외관에만 집착하는 피상적인 고찰일 뿐이다. 지금 절망하고 있다고 말하는 사람은 절망하고 있는 것이며, 스스로 절망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은 역시 절망하고 있지 않는 것으로 간주한다. 그러나 절망은 아주 일반적인 것이다. 오히려 절망하지 않은 사람이 매우 드물고 희귀한 사람이다. 절망이 나타나자 마자 그 사람은 이전부터 절망하고 있다는 것이 명백해진다.
=> 역주 : 여기서 우리는 “스스로 죄인이라고 생각하는 의인과 스스로 의인이라고 생각하는 죄인이라는 두 종류의 인간“이라는 파스칼의 말을 떠올리게 된다. 사실살 절대적인 지평에서 보자면 윤리-도덕적으로 인간은 누구나 비슷하다. 단적으로 선한 인간도 단적으로 악한 인간도 없으며, 누구나 정도의 차이를 가지고 선도 행하고 악도 행한다. 하지만 어떤 이는 자신을 ‘죄인’이라고 생각하고 어떤 이는 자신을 ‘의인’이라고 생각한다. 죄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죄로부터 벗어날 가능성을 충분히 가지고 있지만, 의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그럴 가능성이 없다. 인생을 변증법으로 본다는 것은, 더 좋은 상태를 획득하기 위해서 우선 ‘나쁜 상태’에 대해 자각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절망도 마찬가지다.
결국 어떻게 되어도 상관없는 것에 무한한 가치를 부여하는 것이 세상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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